13일 오후 5시경 의성군에 도착한 조선통신사 옛길 한·일 우정걷기 행렬단35명이 의성에서 하룻밤을 묵고14일 군위군 의흥면으로 출발했다.
조선통신사 옛길 한·일 우정 걷기는 1607년(선조 40년)부터 1811년(순조 11년)까지 약 200년 동안 일본으로 파견된 공식 외교사절단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행사로 지난 1일 서울에서 출발해 5월 23일 일본 동경까지 53일간 총 1,158km의 여정을 이어간다.
지난 4월 1일 서울을 출발한 걷기 행렬단은 문경-안동을 거쳐 의성에 도착한 이후 군위-영천을 지나 부산에 도착한 후 일본 동경에 도착하는 총 연장 1,158km를 52일간 걷는 대장정이다.
2007년부터 격년제로 열렸으나, 코로나로 개최하지 못하고 올해 재개되어 9번째를 맞았으며 이날 의성으로 발걸음 옮긴 행렬단은 영천, 경주, 울산, 부산 등을 지나 일본 대마도를 거쳐 동경(히비야 공원)도착해 모든 일정을 마무리한다.
의성과 조선 통신사
의성군은 역사·지리적으로 조선통신사와 아주 깊게 관련 있는 고장으로, 지금으로부터 595년 전 무신년(1428년), 의성출신 박서생을 정사(正使)로 하는 최초의 조선통신사도 이번과 똑같은 여정으로 일본을 오갔을 것이며, 이후 1590년 정사로 통신사를 이끌었던 황윤길, 회례사 박안신 등 부사와 종사관까지 10명의 의성 인물들이 참여했다. 의성은 통신사 연고 도시로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이다. 통신사 일행을 책임지는 삼사(三使)가 세 명이나 배출된 고장이자, 통신사의 하행로(下行路) 중 한 곳으로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율정호
이렇듯 우리 의성과 관련 있는 뜻 깊은 역사·문화 행사에 환영인파가 보이질 않으니 의성의 역사·문화를 책임진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지난 문화원장을 지낸 ‘고’ 김종우 원장 재임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땐 참 대단했다. 연도에는 환영인파가 바글바글했다. 의성군은 박서생의 개척정신을 계승하겠다며낙단보에 통신사선 '율정호'를 띄우는가하며 의성문화원에서는 율정 박서생선생 학술대회를 개최 하고 야단 법석이더니만 이제는 열정이 식어버렸나. 우리의 지도자들은 틈만 나면 "문화강군을 만들어 의성발전 시킨다"더니 말로만하는 문화발전 어느 누군들 못하랴, 인근 안동시를 보라 안동시는 13일 웅부공원에서 권기창 안동시장이 의성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행렬 들을 따뜻이 환송했다.
사진출처 대구신문
현재 독도와 위안부 문제 등으로 한일관계가 경직된 이때 민간차원에서 개최되는 이번 행사는 한·일 양국의 새로운 평화 이정표를 세워 평화와 우호증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며, 아직 많이 남은 여정 모쪼록 건강하시고, 가시는 발걸음 마다 건강과 행운이 깃들기를 남은 기간 건강하게 완주하시길 조선통신사 관련 군민의 한사람으로서 기원하는 바이다.
조선통신사는(자료출처 두산백과)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성립되자, 조선국왕과 막부장군은 각기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절을 각각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통신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통신관(通信官)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에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중도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다. 그뒤 통신사의 파견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1429년(세종 11) 교토[京都]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朴瑞生)의 사절단으로 최초의 통신사라고 할 수 있다. 파견목적은 임진왜란 전에는 주로 왜구 금지요청이 주가 되었으나, 그 후에는 강화와 포로들의 쇄환(刷還), 일본국정의 탐색이었고, 1636년(인조 14) 이후는 막부장군의 습직(襲職) 축하가 주임무였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의의는 조 ·일 양국간만이 아니라,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삼국의 평화공존을 위한 국제관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데 있다.
파견절차는 일본에서 새로운 막부장군의 승습이 결정되면,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중앙관리 3인 이하로 정사 ·부사 ·서장관을 임명하고 300~500명으로 구성되는 사절단을 편성하였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 뒤,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해로를 이용하여 대마도를 거쳐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하여 일본 각번의 향응을 받으며 오사카[大阪]의 요도우라[淀浦]에 상륙하였다. 그뒤 육로로 교토로 갔다. 조선 전기에는 이곳에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교토가 종점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장군이 도쿄[東京]에 있었기 때문에 목적지가 도쿄가 되었다. 일행이 통과하는 객사에서는 한시문과 학술의 필담창화라고 하는 문화상의 교류가 성대하였다. 특히 통신사에 대한 화려한 접대는 일본의 재정을 압박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으며, 그 때문에 1711년 아라리 하구세키는 통신사 접대에 관한 규정을 바꾸기도 하였으나 1719년에는 다시 환원되었다.
막부장군에게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한 통신사는 대개 6개월~1년이 소요되었다. 그들은 방문하는 곳마다 서화 ·시문 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것이 화려한 행렬도를 그린 병풍 ·회권 ·판화 등의 형태로 전해진다. 또 그들은 귀국 후 일본에서 겪은 일들을 여러 형태로 남겼는데, 이것이 《해행총재(海行總載)》라는 견문록으로 엮어져서 당시 두 나라 간의 외교적인 역할 및 문화교류의 실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