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容恕)라는 말은 관용(寬容)을 베풀어 벌(罰)하지 않고 꾸짖지 아니하며 놓아주는 것을 뜻한다. 이는 신앙(信仰)과 사랑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은 반드시 원수(怨讎)를 갚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용서는 상대방의 허물이나 과실을 눈감아 주거나 혹은 그 책임을 면제해 주거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것을 말한다. 특히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죄인들의 허물과 죄를 용납하고 없애는 것뿐 아니라 그 용서의 대상을 완전히 새롭게 하여 의로운 상태로 만드는 것까지를 포함한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만약에 용서가 없다면 반대로 복수(復讎)가 있을 뿐이다. 속언에 “피는 피를 부른다.”라는 말은 복수로서 끝나지 않고 계속 원수가 되어 자자손손 복수의 칼을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원수는 끝이 없다.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멸망(滅亡)만 있을 뿐이다. 다행하게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자기 아들 독생성자(獨生聖子)를 희생(犧牲)시켜서라도 죄인을 용서(容恕)하시고 영생(永生)이란 선물을 주셨다.
실제적(實際的)으로 용서하면 평안하지만, 복수하면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용서(容恕)하는 것은 자기영광(自己榮光) 영광이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가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하면 숯불을 그의 머리에 붙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는 원수를 용서의 차원을 넘어서 사랑하게 되면 원수인 그가 숯불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성경에 요셉이라는 야곱의 아들이 있는데 야곱이 12 아들을 낳았는데 아버지는 그 요셉을 아끼고 사랑하였다. 다시 말해서 편애(偏愛)하였다. 그리하여 형제들이 그를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여 구덩이 속으로 던져넣었다. 그런데 그의 형제 중에 유다라는 아들이 제안하기를 그가 우리의 골육지친(骨肉之親)인데 죽이지 말고 이집트 상인에게 팔아버리자고 제안하였다. 형제들은 그의 말을 좋게 여기고 그를 이집트 상인에게 은 20량을 받고 팔아버렸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요셉을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서 아버지를 속였다.
그런데 요셉은 팔려 가서 이집트 시위대장(侍衛隊장)의 집에서, 고용(雇傭)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그 집의 시위대장 아내가 유혹하는 것을 거절하다가 모함으로 옥중생활을 하게 된다. 이런저런 것을 생각하면 자기를 이렇게 만든 형제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꿈을 해석하는 은사가 있어 옥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감방에 왕궁에서 술 관원 장을 지내고 떡 관원 장을 지낸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의 꿈을 해석하는 중에, 하나는 죽을 꿈이고 하나는 다시 왕궁으로 복귀한 꿈을 꾸었다고 해석하여 그 해석이 맞아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왕궁으로 복귀하였다.
마침 이집트 왕이 꿈을 꾸었는데 그 나라 박수들을 모아놓고 왕이 꾼 꿈을 해석하라고 요구했지만, 아무도 왕이 꾼 꿈을 해석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옥중생활할 때 자기 꿈을 해석해준 요셉을 기억하고 이집트 왕에게 그를 소개하여 왕은 요셉을 불러오라 명하여 왕의 꿈을 해석하라 하여 그가 왕이 꾼 꿈을 명쾌하게 해석함으로 왕은 팔려 온 요셉을 이집트 총리(總理)로 삼았다. 마침 그 당시 가뭄이 심해서 먹을 양식이 없어서 이집트로 양식을 사러 온 자기의 형제들을 알아보고 그들에게 아버지까지 모시고 오라고 명령하여 모시고 왔다. 문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 형제들이 불안하여 전전긍긍하였다. 요셉은 효자니까 아버지 생전에는 우리에게 원수를 갚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는 원수를 갚을 것이다.
이를 알아차린 요셉은 말하기를 “형님들이 나를 이곳으로 팔아버린 것은 형님들이 아니고 이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형님들의 손을 통해서 미리 보내신 것이라고,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내가 어찌 형들에게 원수를 갚겠습니까? 하면서 아무 걱정하지 마소서 형님들 후손까지도 책임지겠다고 하면서 형들을 즐겁게 용서하였다. 이런 대담한 믿음과 앞을 내다보는 명철함이 없이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원수를 갚아야, 된다는 고정관념(固定觀念)은 매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1975년에 남베트남이 패망하며 포로로 잡히게, 된 이대용 공사를 비롯한 몇몇 한국 외교관들은 정치범수용소 치화 교도소에 갇혀 모진 고문과 학대를 당했다. 그런데 그때 고문하던 특별경찰 안닝노이찡(安寧內政) 소속의 즈엉징특(楊政識) 이라는 경찰 간부가 모진 고문을 하였다. 그런데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한 후 파견된 제3대 주한대사가 바로 즈엉징특이었던 것이다. 즈엉징특 대사가 수교 10주년 기념으로 특별 연설을 하기 위해 참가한 것이다. 두 분이 만나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했다는 것이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우방도 없다.”라는 것이다.
오늘의 현안인 한일 관계는 요셉과 같이 훌륭한 정치인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가? 아니면 요셉과 같은 정치 수준이 높은 국민이 정치인들을 설득해서 해결할 것인가? 한일 관계는 역사적인 사건보다 그 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풀어나가야 하는 방법론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인가? 고민하지 아니할 수 없는 상태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머리 숙여 백배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방법이 가장 현명하고 쉬운 방법이다.
차선책으로는 영원히 일본을 원수로 여겨 원수를 갚아야 하는가? 아니면 작은 것을 양보하고 큰 것을, 위하여 문제를 해결하든지 아니면 역사는 역사이니 역사의 심판에 맡기고 과감하게 용서하는 것, 외에는 어떤 방법이 있을지 국민, 모두가 생각해야 할 숙제(宿題)일 것이다. 이는 하늘의 지시를, 받지 않고 사람의 생각만으로는 해결하기 매우 어려운, 난제(難題) 중에, 난제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과거의 역사만 들먹이며 앞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면 이 또한 다변화하는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정치권과 국민은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용서(容恕)는 미래에 대한 확신(確信)이 없는 자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야곱의 아들 요셉과 같은 정치인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