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유수(流水)같이 흐른다고 말한다. 흐르는 세월(歲月) 속에 과거(過去)와 현재(現在)와 미래(未來)가 공존하고 있다. 과거는 흘러간 물이고 현재는 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물이며 미래는 앞으로 흘러오는 물을 말한다. 프랭클린은 말하기를 “이미 흘러간 물로서 물방아를 돌릴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현실에 변명할 수 없는 옳은 말이다. 이 말에 어느, 누구도 이의(異意)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흘러간 물이라도 다시 퍼 올리면 다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다는 궤변(詭辯)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시 퍼 올린 물도 새로이 흘러오는 물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흘러간 물이라는 것은 과거를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과거에 어리석은 일을 했기로 그것 때문에, 고민할 것은 없다. 고민한다고 흘러간 물이 다시 오지는 않는다. 슬프나 분하나, 과거는 과거로서 묻어버리고 흘러오는 물과 같은 오늘로 새로운 생활을 해야 한다. 과거의 한 토막을 가지고 날이면 날마다 새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백 사람의, 임금의 권력을 모아도 흘러간, 과거를 불러오지는 못한다. 물은 이미 흘러갔고, 흘러간 물은 쫓아갈 필요는 없다. “사람은 과거의 원한과 씨름만 안 한다면 누구나 훨씬 행복하게 될 수 있다.”라고 프랭클린은 말하였다.
사람의 사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달아진다. 즉 산다는 것은 기분이나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제 느낀 것을 오늘도 느낄 수는 없다. 이제 더 바꿀 수 없는 일이라면 그 사실을 후회하거나 비난하지만 말고 단순하게 규정지어버리는 것이, 좋다.”라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하였다. 치매 환자는 과거를 잊어먹는 것이, 병이지만, 정상적인 사람은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뒤에(過去)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未來)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라고 하였다.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동쪽에서 해가 뜨면 서쪽으로 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해가 진 서쪽에서 다시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지난 과거를 회상만 하면 서쪽에서 해가 뜨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오늘의 우리는 과거의 날려버린 기회를 아쉬워하면서 지나간 날의 끝자락을 붙잡고 번뇌한다.
물론 그런 고민과 갈등이 미래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가슴을 쥐어뜯는 자기 학대나 몸부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확실히 과거에 머무는 것은 긍정적인 요소보다 부정적인 요소가 더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 이는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현재와 미래를 향하여 달리라는 말이다. 어느, 누구도 흘러간 물로 물방아를 돌린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고 흘러오는 물만이 물방아를 돌릴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고사성어에 “각주구검(刻舟求劍)”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양자 강을, 건너다가 칼을 물에 빠뜨렸다. 빠뜨릴 때 뱃전에 표시해두었다. 그리고 배가, 닫는 곳에 가서 뱃전에 표시한 대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칼은 그곳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칼은 이미 멀리 지나온 물속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고사성어는 판단력이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꼬집는 말이다. 칼이 빠졌으면 거기서 찾아야지 칼은 과거에 빠뜨렸는데 찾는 것은, 엉뚱한 현재 장소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현재는 칼을 찾을 일이 아니고 새로운 칼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흘러간 물만 탓하고 흘러오는 물을 활용할 줄을 모른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제 밥을 먹었다고 어제 먹은 밥만 생각하고 오늘의 밥은 먹지 아니할 것이다. 어제의 식사 식단보다. 달리하여 더욱더 맛있게 먹을 것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은 시대에 적응해야지 적응하지 못하면 퇴보하고 만다. 찰스 다윈은 말하기를 “살아남는 것은 가장 강한 종이나 가장 똑똑한 종들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들이라”라고 했다. 과거에 머무르는 종보다는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 나가는 종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적자생존이라고 할 때의 적자는 우수한 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을 가리킨다. 다윈의 진화론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혁명의 역사는 단(斷)의 역사였다. 갈릴레오는 세상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생각을 단(斷) 함으로써 과학사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고, 아인슈타인은 지구가 물리적 좌표로서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는 생각을 단(斷) 함으로써 세계관을 혁명적으로 바꿨다. 그러므로 우리도 과거의 역사에만 매달려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과거의 아픈 상처를 싸매고 앞으로 발전을 위하여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과거에만 매달려 있으면 흘러간 물로 물방아를 돌리지 못하는 것처럼, 더 이상의 새로운 발전은, 못할 것이다. 과거는 잊지는 말되 과거에 집착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정글 속의 짐승들은 생존을 위하여 색깔을 바꾸듯이 오늘의 우리도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하여 시대에 맞도록 변할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흘러간 물로는 물방아를 돌릴 수 없고 흘러오는 물 만이 물방아를 돌리듯이 다가오는 시대를 대처하기 위하여 한일 관계 개선에도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